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하고 사회를 개혁하다 (느헤미야 1-13장)

2021. 5. 3. 22:14카테고리 없음

느헤미야는 왕의 허락을 받고 예루살렘에 와서 성벽을 재건하고 사회를 개혁했습니다.
01. 성벽 재건(1-7장) 느헤미야는 기도하며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완성했습니다.
02. 언약 갱신(8-13장) 에스라가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쳤고 느헤미야는 성벽을 봉헌했습니다.

01. 성벽 재건(1-7장)

① (1장) <느헤미야의 기도>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20년에 2차 귀환에서 돌아온 동생 하나냐("여호와의 은혜")에게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BC 586년 이후 140년간 훼파돼 있었고 주변의 약탈이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술 관원장은 왕에게 식음료를 진상하는 사람으로 왕에게 가장 신임받는 고위직 관료였습니다.

느헤미야("여호와의 위로")는 바사의 유다인으로 아닥사스다왕의 측근인 술 관원장입니다. 까다로운 왕에게 총애를 받은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BC 444-433년 유다 총독으로 부임하여 3차 귀환 뒤 바사로 귀국했다가 BC 432년에 예루살렘으로 재귀환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한 탁월한 실행가로 오늘날에도 훼파된 공동체를 재건할 느헤미야와 같은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② (2장) <느헤미야의 비전> 

느헤미야는 여름에는 악메다 궁에, 겨울에는 바벨론 궁에 머물다가 봄가을에 수산 궁에 오는 왕에게 BC 444년(농사력 기준) 니산월(3-4월)에 보고를 올렸습니다.

아닥사스다는 왜 허락을 했을까요? 궁중연회 중 신하가 수심을 띠는 것은 사형감이었습니다. 문헌상 아닥사스다왕은 신경질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폭군이었습니다. 게다가 그가 성벽 공사를 중단시켰던 장본인이었습니다. 당시 정치에 영향력을 미치던 왕비도 동석한 자리였습니다. 그 이유는 왕이 아하수에로의 아들이라서 유대인 관료를 중용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왕과 왕비 모두에게 신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군대의 호위 아래 귀환했고 홀로 밤에 예루살렘을 둘러보는 암행 조사 후 성벽 건축의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③ (3장) <재건자들의 목록>

느헤미야는 제사장과 귀족, 백성이 다 동참하게 하는 리더십과 조직력을 발휘했습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은 백성을 대표해서 첫 삽을 뜨기는 했지만 손자를 산발랏의 딸과 결혼시켰고 도비야에게 성전방을 주었던 인물입니다. 드고아(예루살렘 남쪽 15km에 위치)의 귀족들은 아라비아인이 두려워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르바야는 예루살렘 변두리 지방의 관리자였습니다. 할로헤스 가의 딸들은 아들 대신 상속자가 되듯 노역에도 동참하는 책임감을 보였습니다. 므레못은 족보가 불분명해 제사장직을 박탈당한 학고스의 손자였으며 이방인과 결혼해서 책망을 듣기도 했지만(스 10:36) 겸손히 각성하여 처음 맡은 구역을 마치고 다른 구역도 담당했습니다.

④ (4장) <대적자들에 대비>

성벽이 연결되고 절반쯤 작업했을 때 중단 위기가 있었습니다. 외적인 위기로 첫째, 사방의 대적자들이 조롱하고 위협했습니다. 둘째, 흙무더기(성벽 잔해)가 여전히 많았습니다. 셋째, 한정된 참여자들에게 일이 가중되어 상당히 지쳐있었습니다. 넷째, 할 수 없다는 회의적인 의견들이 나왔고 다섯째, 외곽의 유다인들이 대적자들의 압박으로 인해 중단하라고 요청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한 손으로는 일하고 한 손에는 병기를 잡고 두 배의 집중력으로 위기를 돌파해야 합니다.

⑤ (5장) <동지들에게 선대>

내적인 위기도 왔습니다. 첫째, 흉년이 닥쳐서 먹을 양식이 부족했고 둘째, 바사 제국에 내야 하는 과중한 세금이 부담되습니다. 셋째, 같은 동족에게 자식을 종으로 내주어야 했으며 넷째, 귀족과 민장들이 고리대금업을 했습니다. 지도층과 부유층의 고리대금을 금지시키고 총독의 녹을 받지 않고 유다인을 공궤한 느헤미야의 섬김의 리더십이 빛이 나는 대목입니다.

⑥ (6장) <음모론자를 무시>

느헤미야는 음모론자들을 이겨냈는데 그 대응법은 첫째, 암살할 계획으로 담판을 요청하지만 느헤미야는 네 번이나 불응했습니다. 둘째, 모반 혐으로 고발하겠다고 위협했지만 느헤미야는 사실무근이기 때문에 일절 만나지 않았습니다. 셋째, 비난 여론을 조성하려고 성전 피신을 권유했지만 이에 대해 느헤미야는 차라리 죽으면 죽으리라는 자세로 불응했습니다. 불필요한 논쟁과 싸움에는 무대응 원칙이 가장 탁월한 대책일 때가 있습니다.

오노 평지는 예루살렘 북서쪽 32km에 있는 유다지역 외부에 있습니다. 가스무는 게셈의 아라비아식 이름이었습니다. 스마야는 성전에 들어간 것으로 보아 제사장이자 선지자였는데 뇌물을 받고 성전 피신을 권면해 느헤미야 총독에게 사회적 비난을 일으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흔들림 없이 52일 만에 성벽 공사를 끝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예루살렘 주민의 생존권 보장, 예루살렘의 정치적 자주권 확립, 유다 민족의 공동체성 공유에 의의가 있습니다. 140년간 못한 일을 불과 52일 만에 끝냈다는 것은 놀라운 믿음의 승리였습니다.

⑦ (7장) <귀환 공동체 계수>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을 파수할 책임자들을 세웠지만 거주 인구가 적어서 방어력이 부족하므로 포로귀환자의 인구조사부터 먼저 했습니다. 이는 그가 예루살렘을 살려야 한다는 당위성만으로 강제 이주정책이나 이벤트성의 부양책을 밀어붙이지 않았고, 오히려 백성들의 상황부터 돌아봤기 때문입니다. 그는 93년 전 1차 귀환자의 명단부터 살펴봤습니다(스 2:1-70).

 02. 언약 갱신(8-13장)

① (8장) <율법 낭독>

에스라는 수문 앞(성전 앞) 광장의 강단에 서서 백성에게 율법책을 낭독하고 가르쳤습니다. 당시 유다인이 공용어인 아람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히브리어로 된 토라를 아람어로 통역·해설해 주어야 했습니다. 백성들은 회개의 눈물을 흘렸고 일곱째 달 절기인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② (9장) <언약 갱신>

7월 24일에 온 백성이 금식하고 회개하며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하고 언약을 갱신했습니다.

③ (10장) <언약 비준자>

귀환자들은 언약을 비준하고 말씀대로 살겠다고 맹세했습니다.

④ (11장) <재정착 계획>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내외부에 거주할 사람들을 결정했습니다. 지도자들이 솔선수범해 성내에 거주했고 일반 백성은 제비를 뽑아 10분의 1을 성내에 거주하게 했고, 자원자들도 거주하도록 했습니다.

⑤ (12장) <성벽 봉헌>

제사장과 레위인을 계수했고, 예루살렘 성벽 봉헌식을 비로소 거행했습니다.

성벽은 이미 완공되어 있었지만 가옥과 주민이 없어 황량하고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백성들이 먼저 언약에 재헌신하게 하였고, 거주 계획부터 시행한 이후에 성벽을 봉헌했기 때문에 성벽 봉헌은 늦어졌습니다. 성벽 봉헌식을 급하게 행사로 끝내지 않고 예루살렘이 완전히 살아나게 철저히 준비한 뒤에 봉헌식을 진행했습니다.

⑥ (13장) <사회 개혁>

느헤미야는 바사로 일시 복귀했다가 돌아와 대제사장이 성전 안에 이방인 도비야에게 방을 준 사실을 알고 정리했습니다. 또한 레위인들에게 양식을 지원했고, 안식일에 거래를 금지시켰으며,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지했습니다.

  • 기도하는 신실한 사람이 은혜를 입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1:11, 2:8).
  • 당신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한 자에게 은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5:19, 13:14, 31).
  • 은혜와 긍휼이 많으사 돌이키는 백성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9:17, 31-32).